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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3월 쌍용자동차가 35년 만에 KG모빌리티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쌍용그룹의 20개 계열사가 IMF로 뿔뿔이 흩어졌어도 쌍용자동차는 국내 자동차 기업 중 최장수 브랜드를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2022년 KG그룹이 쌍용그룹을 인수하면서 그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비운의 기업 쌍용 그룹의 창업과 몰락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쌍용

     

    1. 창업주 김성곤

    쌍용을 시작한 주인공 김성곤 창업주는 1913년 경북 달성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납니다. 운동을 매우 좋아했던 그는 오늘날 고려대학교였던 보성 전문학교에서 유도부 주장이었습니다. 당시 연희 전문학교와 보성 전문학교는 매년 패싸움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성곤의 제안과 설득으로 매년 서로의 학교를 번갈아 가며 초대해 막걸리 마시기 대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호방한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일화입니다. 1937년 보성 전문학교를 졸업한 김성곤은 2년 동안 은행에 다니다가 27세에 첫 창업을 합니다. 첫 번째 아이템은 비누공장이었습니다. 경영난으로 도산한 비누공장을 지인 세 명과 함께 인수합니다. 세 명이 함께 투자했다는 의미로 이름을 삼공유지 합자회사로 정합니다. 당시 일제가 한국의 주요 산업 통제령을 내렸기 때문에 앞으로 생필품이 더욱 부족해질 거라고 판단하고 비누공장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막상 사업을 시작해 보니 본질은 원료 조달에 있다고 파악하고 원료의 대량 확보에 주력합니다. 전쟁 말기 만주에서 일본으로 수송하던 콩기름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다가 묶여있던 적이 있었는데 김성곤은 이를 놓치지 않고 콩기름을 확보해 둡니다. 그 결과 해방 직후 다른 공장들은 원료 공급이 끊겼지만, 삼공유지는 비축해 둔 원료로 계속 비누를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비누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폐기하지 않고 물비누로 만들어 판매하였는데, 식당에서 사용하기 편했기 때문에 불티나게 판매되어서 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김성곤 회장은 비누 사업에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한국에 더 수요가 많아질 의류 사업에 눈을 돌립니다. 1948년 금성방직을 설립하고 해방 직후 일본이 버리고 간 방적기 340대를 확보하여 공장을 설립합니다. 광복 후 섬유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금성방직은 설립 2년 만에 자본금을 10배로 불리며 수직으로 성장합니다. 이때 방직으로 벌어들인 자본은 쌍용그룹의 모체가 되었고, 이후 금융사인 고려 화재, 언론사인 연합신문과 동양통신, 학교법인 국민학원을 세우며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2. 쌍용의 시작

    어느 날 김성곤 회장은 임직원들 앞에서 시멘트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1962년 쌍용양회를 설립합니다. 김성곤 회장은 당장은 힘들어도 먼 미래를 내다보고 국가 경제에 도움을 줄 업종을 선택했습니다. 강원도 영월군 서면 쌍용리에 40만 톤 규모의 시멘트 공장을 시작하고, 이때 쌍용리의 지명을 따와서 회사명을 지었습니다. 시멘트 사업은 처음에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공사를 시작해서 2년 뒤 준공을 한 쌍용양회는 주한 유엔군에 군납하게 되고, 국내 최초로 시멘트를 수출합니다. 다행히 1970년대에 들어서는 국내에 시멘트 수요가 급증했고, 일본에도 연간 30만 톤가량의 시멘트를 수출하게 됩니다. 쌍용양회는 현재도 강원도 동해, 문경, 영월, 광양 4개의 공장에서 연간 1500만 톤의 시멘트를 생산하며 국내 수출양의 5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후 쌍용은 삼화제지, 금성 해운 등을 세우며 그룹을 확장합니다. 김성곤 회장은 정치인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데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4선을 지내고,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에는 공화당 소속으로 6~8대 의원을 지내며 실세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0.2 항명 파동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온 후 폭음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975년 6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날 새벽 고려대학교 졸업식 축사를 준비하다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 주변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3. 쌍용 자동차 김석원

    재벌들의 자녀가 군 입대를 기피하던 시절 김성곤 회장의 아들 김석원은 미국 유학 중에 귀국하여 해병대에 자원입대 합니다. 또 베트남에도 자원 파병하여 수색대로 10개월간 활동하기도 합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김석원은 지도에서 우연히 대관령 스키장 표시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막상 대관령에 직접 가보니 제대로 된 스키장이 없었습니다. 제대 후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던 김석원은 주말마다 스키장을 할 만한 곳을 찾아다닙니다. 자식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던 아버지에게 본인의 사업에 투자해 달라고 제안합니다. 그는 자본금 2억 원을 투자받아 1974년 용평스키장을 개장합니다.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에 제설기와 리프트를 들여와 국내 최초의 스키장을 개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듬해 김성곤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김석원은 서른 살의 나이에 쌍용 그룹을 이끌게 됩니다. 모두가 어린 회장을 못 미더워했지만, 김석원 회장이 이끄는 쌍용은 아버지 때보다 더 성장합니다. 김석원 회장은 쌍용 중공업과 쌍용 종합건설, 쌍용 정유, 효성 증권을 인수해서 계열사가 20개로 늘어나며 재계 6위까지 올라갑니다. 미국에서 레이싱 스쿨을 수료할 정도로 자동차 마니아였던 김석원은 야심 차게 자동차 사업을 시작합니다. 1988년 삼성과 힘겨운 경쟁 끝에 동아 자동차를 인수합니다. 쌍용자동차로 사명을 바꾸고 코란도 훼미리를 출시하는데 서울 올림픽 이후 레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판매량이 급증합니다. 이후 1993년 메르세데스 벤츠와 기술 제휴를 하여 벤츠의 엔진이 탑재된 무쏘를 출시합니다. 무쏘는 13년간 25만 대가 판매되며 국민 SUV가 되었습니다. 이후 벤츠 E클래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고급 세단 체어맨을 출시하는데 회장님 차로 불릴 만큼 성공의 상징이 됩니다.

     

    4. 쌍용의 몰락

    정치만은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김석원 회장은 1986년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됩니다. 하지만 국회의원으로 입문하자마자 고난이 시작됩니다. 쌍용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했다는 의혹을 받고, 정계의 다양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또한, 1997년 10월 체어맨이 출시된 지 2개월 후 IMF 외환위기가 터집니다. 자동차 사업에 돈을 너무 많이 투자한 쌍용차는 자금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대우에 인수됩니다. 쌍용그룹은 쌍용차의 부채 감당이 어려워지자, 쌍용 정유, 쌍용 투자증권, 쌍용 중공업 등을 잇달아 매각하며 그룹을 살리기 위해 수습에 나섭니다. 하지만 쌍용그룹은 서서히 해체 수순을 밟게 됩니다. 결국 국회의원직도 사퇴한 김석원 회장은 정치와 기업 둘 다 잃고 몰락하게 됩니다. 이후 쌍용 자동차는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며 수난을 겪습니다. 결국 2022년 KG그룹이 인수하여 KG모빌리티로 이름을 바꾸며 쌍용 자동차라는 이름은 35년 만에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됩니다.

     

    KG모빌리티가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던 쌍용 자동차의 화려한 시절을 부활시켜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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