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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다양한 치킨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치킨의 클래식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프라이드 치킨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프라이드 치킨의 원조 중의 원조이자 미국식 치킨의 표준을 만든 KFC의 창업주였던 불운의 사나이 샌더스와 프랜차이즈의 시작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KFC

     

    1. KFC의 창업주 - 불운의 사나이 샌더스

    KFC의 창업주 할랜드 샌더스는 1890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평생 잘될만하면 불운이 따르는 불운의 사나이였습니다. 아버지가 7살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동생을 챙겨야 했고, 12세 때 어머니가 재혼을 하셨는데 새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샌더스는 가출을 하게 됩니다. 농장일 뿐만 아니라 기차 엔진에 들어가서 석탄재를 긁어내는 일까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던 샌더스는 성실했고 사업 수완도 있었습니다. 서른 살쯤 투자자들을 모아서 오하이오 강에서 페리를 운영하는 회사를 차리게 되는데 이때 처음으로 큰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그는 주식을 팔아서 더 큰 사업에 도전하기로 하는데 기존의 램프보다 효율적인 아세틸렌 램프를 만드는 회사에 번 돈을 모두 투자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뒤 전기 램프가 등장하고 램프 사업은 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샌더스는 무너지지 않고 다시 직장을 구해 미쉐린 타이어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게 됩니다. 어느 날 회사 차를 몰고 가는데 지나가던 다리가 무너지는 일이 생깁니다. 다행히도 샌더스는 무사히 탈출했지만, 차량은 침수되었고 회사에서 해고됩니다. 그는 마흔 살이 될 때까지 하는 일마다 엎어지고, 돈은 하나도 없었던 샌더스의 인생은 불운 그 자체였다.

     

    2. KFC의 시작

    그런데 이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옵니다. 코빈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주유소를 운영해 보라는 제안을 받는데, 코빈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지만 플로리다 북부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제법 사업이 잘되었습니다. 그러자 샌더스는 주유소 옆에 카페를 차리고 '샌더스 카페'로 이름을 짓습니다. 주유하러 온 손님들에게 음식을 판매했고, 이때 선보인 메뉴가 지금의 KFC의 시작이 된 메뉴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었습니다. 프라이드치킨은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와 관련 있는 음식입니다. 당시 백인 농장주들은 오븐에서 닭가슴살처럼 흰 살이 많은 부분을 굽는 로스트 치킨을 선호했고, 달이 없는 날개, 다리, 목 등의 부위는 흑인 노예들이 가져다 기름에 튀겨 먹었습니다. 또 아프리카에서 했던 방식대로 향신료를 뿌려 먹음직스러운 치킨을 만들었는데 샌더스가 이 남부의 프라이드치킨을 메뉴로 선보였고 치킨 맛집으로 소문이 나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하지만 이 치킨 요리의 문제는 한 마리를 튀기는 데 30분이나 걸려서 많이 판매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샌더스의 눈에 압력밥솥이 눈에 띕니다. 원래 압력솥은 실험실에서만 사용했는데, 1938년 뉴욕에서 처음 가정용으로 보급되었고 고열과 고압력을 이용해 음식을 빠르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샌더스가 압력솥에 치킨을 튀겨보니 짧은 시간 속까지 치킨이 잘 익는다는 걸 발견합니다. 조리 시간 30분은 8분으로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기존의 압력솥에 압력 조절 밸브를 만들어서 기름을 넣어도 안전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양념 배합을 개발하여 11가지 비밀 양념을 섞은 비밀 레시피를 만들어 냅니다. 장사가 너무 잘 되자 샌더스는 주유소를 없애고, 그 자리에 호텔을 만들었고 140석짜리 레스토랑으로 사업을 확장합니다. 훗날 켄터키 주지사는 지역 음식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며 대령이라는 뜻의 'Colonel'이라는 명예 훈장을 수여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그는 커넬 샌더스로 불리게 됩니다.

     

    3. 프랜차이즈의 시작

    그런데 잠잠했던 샌더스에게 또다시 불행이 찾아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가게에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고, 사업 확장을 위해 대출을 많이 받았던 샌더스는 다시 위기에 접어듭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18세에 결혼했던 아내와 이혼하고, 비서와 재혼을 하게 됩니다. 50세가 넘은 샌더스는 일을 안 해도 노후에 계속 수입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캔터키 치킨의 레시피를 다른 가게에 파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구상합니다. 그는 자동차에 압력솥과 양념을 싣고 켄터키 지역의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치킨 레시피를 사달라고 영업을 시작합니다. 주인들은 기존에 판매하던 치킨이 있었기 때문에 수백 번 거절당했지만, 샌더스는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의지를 활활 태우던 샌더스는 선거에 출마합니다. 당시 샌더스는 켄터키 주에서 아주 유명 인사였기에 유명세를 힘입어 켄터키 주 상원의원에 도전해 정계 진출을 꿈꿨지만 낙선합니다. 샌더스는 다시 열정적으로 프랜차이즈 영업을 했고, 62세에 시카고 대학에서 레스토랑 단기 코스를 수강합니다. 거기서 28살 어린 피트 하먼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처음 수업부터 아주 말이 잘 통했습니다. 어느 날 샌더스는 하먼의 가게에 가서 치킨을 조리해 맛 보여 줬지만, 하먼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우연히 들른 하먼의 가게에서 커다랗게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간판을 걸고 장사를 시작한 것을 알게 됩니다. 압력솥을 8개를 걸고 치킨을 튀겨낼 만큼 장사가 매우 잘 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센더스와 하먼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고 닭 한 마리당 5센트씩 받기로 합니다. 이후 하먼은 레시피와 직원 교육 매뉴얼, 운영 매뉴얼 등을 정리하고, 패밀리 사이즈 버켓도 하먼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샌더스의 가게는 손님의 발길이 끊기고 적자가 계속됩니다. 미국에 전국적으로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사람들이 샌더스의 가게를 들르지 않고 그냥 통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66세의 샌더스는 호텔과 레스토랑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인디애나주, 오하이오주까지 찾아가서 적극적으로 프랜차이즈 영업을 시작합니다.

     

    4. KFC의 새로운 주인

    1956년 8개였던 프랜차이즈가 1962년 600개까지 확장합니다. 프랜차이즈 매장 수가 많아지면서 관리가 어려워지자, 샌더스는 그의 변호사였던 존 브라운에게 200만 달러에 KFC를 매각합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KFC의 홍보대사가 되기로 하고 연봉 4만 달러씩 받기로 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KFC의 매장으로 구색이 갖춰지는데, 메뉴와 매장의 디자인을 통일했고, 주식에도 상장합니다. 1970년대 48개국에 매장만 3000개 이상으로 빠르게 성장했고, 5년 뒤 존 브라운은 다시 KFC를 보드카를 만드는 회사 휴 블레인에 매각하여 큰 시세 차액을 얻게 됩니다. 이 거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샌더스는 공개적으로 KFC의 신메뉴들을 저격하는 발언을 했고, 창업주와 회사가 싸우는 동안 KFC의 매출은 주춤합니다. 이 사이 맥도널드가 무섭게 추월했고, 1980년 샌더스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이 싸움은 종결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전국의 KFC 매장을 돌며 직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이후 오늘날까지도 KFC는 미국에서 맥도널드에 이은 패스트푸드 2위 브랜드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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