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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가 대세인 요즘 K-푸드, K-뷰티, K-콘텐츠로 주목받는 기업 CJ는 TvN, 올리브영, cj오쇼핑까지 식품, 물류, 유통, 미디어, 엔터테인먼트까지 전 분야를 아울러서 우리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속성이 다른 제조업과 콘텐츠업을 겸하며 소비자의 마음을 잘 읽고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CJ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1. CJ 역사의 시작 - 탄피와 설탕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1951년 부산에서 삼성 물산을 설립합니다. 당시 전쟁으로 사방에 널린 고철과 탄피를 수집해서 일본에 팔아 달러를 벌었고, 그 돈으로 다시 중국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합니다. 이후 1953년 제일제당을 설립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설탕을 생산하고, 최초의 복합 조미료 다시다를 만들며 승승장구하며 사업을 키워나갑니다. 삼성물산에서는 비료를 취급했고, 의류를 취급하는 제일모직, 현재의 삼성생명인 동방생명과 현재 신세계 백화점인 동화 백화점도 인수했습니다. 또한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언론 사업에도 진출하면서 그룹사로 확장해 나갑니다. 하지만 1966년 대기업 삼성의 발목을 잡는 시간이 발생하는데 바로 사카린 밀수 사건입니다.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 공업이 사카린 2200여 포대를 건설 자재인 거처럼 속여 국내에 판매하려고 수입했다가 들통이 납니다. 이 일로 이병철 회장은 책임을 지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한동안 삼성그룹은 장남 이맹희가 이끌게 됩니다. 2년 뒤, 경영에서 물러나 있던 이병철 회장이 복귀하자 차남 이창희가 경영권을 노린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아버지를 밀고하는 탄원서를 보냅니다. 아버지 이병철 회장은 부정한 일을 저질렀으니, 기업에서 영원히 손을 떼야한다는 내용과 함께 각종 탈세와 불법 의혹을 고발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은 천륜을 어기는 것이라며 탄원서를 받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이병철 회장은 둘째 아들을 축출합니다. 이때 이병철 회장은 장남 이맹희도 탄원서에 공모했다고 의심하여 둘의 사이도 금이 갑니다. 자존심이 강했던 장남 이맹희는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많았습니다. 결국 이병철은 1976년 자신의 후계자로 셋째 이건희를 지명하고, 다른 형제들이 이건희의 리더십을 방해하지 않고 물러나기를 원했습니다. 이맹희는 경영에서 물러나 이때부터 해외를 떠돌게 됩니다.
2. CJ의 리더 - 이병철 회장의 손주 이재현
이병철 회장은 장남 이맹희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장손 이재현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버림받은 아버지를 보며 자란 이재현은 삼성그룹에 들어갈 마음을 일찌감치 접고, 대학 졸업 후 씨티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를 알게된 이병철 회장의 불호령이 내려졌고, 결국 이재현은 1985년 제일제당에 평사원으로 입사합니다. 이병철은 장손을 각별히 아껴서 어렸을때부터 직접 후계자 수업을 했고, 아들 이맹희에게는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았지만, 며느리에게 지분을 남김으로써 이재현이 CJ를 물려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덕분에 이재현은 2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제일제당을 승계받고 경영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1993년 이재현과 누나 이미경은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고, 1997년에는 삼성그룹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합니다. 그러나 이맹희는 이병철 회장의 상속 재산을 놓고 이건희와 소송을 벌이게 됩니다. 삼성물산 직원이 CJ 이재현 회장을 미행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삼성과 CJ의 해묵은 갈등은 언론을 통해 종종 드러나며 이때부터 CJ는 삼성과 전혀 상관없이 독자 노선을 선택합니다.
3. CJ의 독립과 영화산업 진출
삼성으로부터 독립한 CJ는 영화 산업의 진출을 시도합니다. 1995년 삼성, 엘지, 대우가 TV와 비디오플레이어 같은 가전제품 산업을 키우고 있었고 이에 걸맞은 볼거리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국내 영화 시장은 규모도 작고, 볼만한 영화도 적었기 때문에 수많은 대기업이 앞다퉈 영화 산업에 진출했습니다. 이 흐름을 읽고 당시 30대였던 이재현과 누나 이미경은 LA로 갑니다. 말이 필요 없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알라딘과 라이언 킹을 만든 제프리 카젠버그, 음반 업계의 혜성 데이비드 케펜이 만든 신생 영화사 드림웍스에 투자했습니다. 드림웍스의 창업자 3인방은 젊은 남매의 에너지에 반했고, 삼성을 비롯해 유수의 투자 제안을 받았지만, 제일제당의 투자를 받기로 결정합니다. 제일제당의 당시 연 매출은 1조 원대였고 이 중 20%를 드림웍스에 투자하는 건 위험해 보였지만, 투자에는 주요한 조항이 있었는데 바로 영화배급, 마케팅, 관리, 재무까지 영화산업 전반의 기술을 전수받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 투자는 재무적으로도 크게 성공했고, 제일제당 콘텐츠 사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CJ는 2000년 CJ 엔터테인먼트를 분사하고 영화, 극장, 케이블 TV에 5000억 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결정합니다. 많은 실패를 거듭하고 2014년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린 CJ엔터테인먼트의 첫 글로벌 대작 '설국열차'가 나옵니다. CJ 엔터테인먼트가 500억을 투자해서 대박이 난 설국열차는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최대의 제작비였습니다. 미국에 진출해서 한 달 만에 극장 매출 450만 달러를 돌파하며 미국시장에서 반향을 일으킵니다. 한국 영화의 저력을 미국에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고 1700만 관객을 동원해 대한민국 역대 관객수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명량이 개봉됩니다. 2014년부터 2017년은 CJ ENM의 해라고 할 만큼 명량, 국제시장, 베테랑 등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배급한 영화 겨울왕국이 터지면서 연 매출 4000억 원 이상으로 국내 배급사 1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CJ ENM은 영화를 기획, 제작, 투자, 배급하고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시설까지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배워온 막강한 스튜디오 시스템으로 영화 산업을 수직 통합했습니다. 1998년 CJ는 11개의 스크린을 가진 국내 첫 멀티플렉스 CGV 강변을 오픈합니다. 멀티플렉스와 스크린이 늘어날수록 한국에서 영화를 보는 인구가 늘어났고 2004년 실미도가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 2012년에는 한국 영화 관람객이 연간 1억 명, 2013년에는 2억 명을 돌파했습니다.
4. CJ의 위기 - OTT 바람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누리던 CJ에 강력한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넷플릭스가 이끈 OTT 바람으로 사람들은 영화관에 덜 가게 되었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극장가는 최악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동안 CJ는 사업을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하고자 각국에 투자했는데, 특히 튀르키예 최대의 영화관 기업 마르스 엔터테인먼트에 투자했다가 튀르키예 리라화가 급락하면서 큰 채무를 안게 되었고, 그룹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이 위기는 현재도 진행 중이어서 얼마 전 대규모 유상증자를 시도했습니다. 콘텐츠 산업의 환경 변화가 극장의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매출이 연 2조 원에 육박했지만, 팬데믹때는 반토막이 났고, 영업 손실만 2020년 3800억 원, 2021년 2400억 원, 2022년 767억 원으로 3년간 누적 적자만 7000억 원, 여기에 튀르튀예에 투자하느라 빌린 채권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5. CJ의 잠재된 가능성
아직도 CJ의 잠재된 가능성도 큽니다. CJ는 국내 기업 중 칸 영화제를 가장 많이 수상하면서 국제적으로 가능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최근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과 헤어질 결심이 상을 휩쓸기도 했습니다. 기생충이 2019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직후 이미경 부회장이 직접 소감을 밝혔는데, 많은 외신이 그녀를 궁금해했습니다. 기생충과 헤어질 결심을 제작 총괄한 이미경 부회장은 그룹 총수로서가 아니라 영화판에서 20년간 쌓은 노하우로 직접 진두지휘 했고, 국제 영화상을 위해서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동원합니다. 북미 마케팅에만 100억 원을 투자하며 비영어권 영화인 기생충의 마케팅에 더욱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사랑받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CJ의 능력은 OTT 시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파워로 작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