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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비통을 시작으로 주류, 보석 등 75개의 명품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그룹 LVMH의 창업자와 역사, 아르노 회장, 2024 파리 올림픽 후원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LVMH 그룹 브랜드

     

    1. 루이비통의 역사

    루이비통은 1921년 프랑스의 시골에서 태어납니다. 5대째 목공소를 하는 집안이라서 태어났을 때부터 나무가 아주 친숙했습니다. 하지만 루이가 10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13살이 되던 해 무작정 집을 나옵니다. 루이는 파리로 가고 싶었지만, 빈털터리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목공소나 마구간에서 일을 해서 끼니를 때우고 여비를 마련해서 2년 만에 파리에 도착하게 됩니다. 파리에 도착한 루이는 당시 최고의 트렁크 장인이었던 무슈 마레샬 밑에서 일하게 됩니다. 루이는 짐을 싸는 패커를 맡았는데, 짐을 워낙 꼼꼼하게 잘 싸서 짐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무슈 마레샬은 루이비통에게 나폴레옹 3세의 황후이자, 프랑스의 마지막 황후였던 외제니의 짐을 싸는 일을 맡겼습니다. 외제니는 당시 패션을 선도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한 번씩 유럽을 순방하면 짐이 매우 많았는데 모두 루이가 짐을 쌌습니다. 외제니는 루이에게 트렁크를 제작해 달라고 의뢰를 했고, 이때 루이가 만든 트렁크는 굉장히 크고 기능적이어서 외제니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이후 외제니는 루이를 후원했고 1854년 파리에 여행 가방 전문 매장을 차리게 됩니다. 때마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철도가 발달하면서 여행 인구가 늘어납니다. 당시 부자들은 철도로 여행했기 때문에, 기차에 실을 수 있는 여행용 트렁크가 인기였습니다. 루이는 당시 유행하던 트렁크와 다르게 평평하게 만드는 대신 방수 처리에 신경을 씁니다. 목공소의 아들이었던 루이는 잘 젖지 않는 포플러 나무 목재와 잘 깨지지 않는 너도밤나무로 부목을 댑니다. 젖으면 냄새가 나는 가죽 대신 화가들이 쓰는 캔버스 천을 코팅해서 입히자 가볍고 튼튼하고 여러 겹 쌓을 수 있는 트렁크가 완성되고 대박이 납니다. 그래서 루이는 빠르게 자수성가하게 됩니다.

     

    2. 모조품과의 전쟁

    루이비통의 트렁크가 잘 나가자 초반부터 똑같이 생긴 모조품이 시중에 나오게 됩니다. 1888년부터는 차별화를 두기 위해 캔버스를 갈색과 베이지색으로 염색을 합니다. 1896년 루이의 아들 조르쥬 비통이 아버지의 이니셜 L과 V를 비스듬히 겹치고, 여기에 꽃과 별 무늬를 번갈아 가며 교차한 문양을 만드는데 그것이 오늘날 루이비통의 상징인 모노그램 패턴입니다. 그런데 루이비통 패턴이 들어간 트렁크는 도둑들의 표적이 되었고, 그래서 1886년 열쇠가 없으면 절대 열 수 없는 텀블러 자물쇠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만든 자물쇠 역시 오늘날까지 루이비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루이는 생전에 핸드백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들 조르쥬 비통이 가업을 이어받은 후에는 여행 수단이 기차에서 자동차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쁜 트렁크보다는 예쁜 핸드백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지금도 사랑받는 키폴백, 스피드 백이 만들어졌습니다. 1932년에는 한 샴페인 제조사가 고객들에게 선물할 샴페인을 5병 담을 수 있는 백을 루이비통에 의뢰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게 양동이 모양의 노에백으로 오늘날 버킷백의 원조입니다. 조르쥬는 오늘날 루이비통 시그니처 가방의 대부분을 이때 만들게 됩니다. 조르쥬의 아들 가스통 루이비통도 예술적인 기질이 남달랐고 루이뷔통 제품에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80권의 책과 타자기를 수납할 수 있는 트렁크를 만들었고, 프랑스의 배우 릴리 폰스를 위해 36켤레의 신발을 수납할 수 있는 트렁크를 만들었습니다. 예술가와 셀럽들을 위한 루이비통의 맞춤 제작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2년에는 피겨의 여왕 김연아 선수를 위해서 특별한 트렁크를 제작해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3. 루이비통의 성장

    1977년까지는 루이비통 매장은 단 2곳뿐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부자와 셀럽만을 위한 제품을 만드는 럭셔리 공방 수준이었습니다. 가스통이 사망한 후 두 아들이 루이뷔통을 맡았지만, 성장세는 둔화되었고 결국 3대에 걸친 비통 가문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깁니다. 철강 사업으로 국제적인 사업 경험이 있었던 루이비통 집안의 사위 앙리 라카 미애가 65세에 경영을 맡게 됩니다. 이후 매장을 140개로 늘리고, 현대적인 공장을 만들고 다른 브랜드를 인수합병을 하며 루이비통을 명품 그룹으로 만듭니다. 1987년 주류회사 모엣 헤네시와 운명의 합병을 추진하여 두 기업의 이니셜을 합쳐 LVMH 그룹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런데 두 기업이 만나 루이비통의 앙리 라카미에와 모엣 헤네시의 알랭 슈발리에가 지분 전쟁을 벌입니다. 1987년 블랙 먼데이가 일어나면서 전 세계 주가가 대폭락 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 베르나르 아르노는 LVMH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여 최대 주주가 되었고, 앙리 라카미에와 알랭 슈발리에를 모두 쫓아내고 최종 위너가 됩니다.

     

    4. 캐시미어를 입은 늑대 - 베르나르 아르노

    아르노 회장은 늑대처럼 야수의 심장을 가진 사업가입니다. 패션과는 관련이 없었던 아르노는 프랑스의 소도시에서 태어났고 30대 초반 아버지의 건설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를 설득해 건설 사업은 매각하고 뉴욕에서 부동산 사업에 집중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미국에서 택시를 탔을 때 기사에게 '프랑스에 대해서 뭘 아시느냐'라고 물었고, 기사님은 '내가 프랑스 대통령은 모르지만, 크리스찬 디올은 안다'라고 답하자 여기서 사업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바로 명품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1984년 아르노는 파산 직전이었던 크리스찬 디올의 모기업을 부삭그룹을 인수하고 9000명 가까운 인원을 해고하며 구조조정은 단행했습니다. 그 결과 2년 만에 디올은 흑자로 전환했고, 큰돈을 벌어들입니다. 그렇게 디올로 명품 사업을 확장한 아르노는 1989년 슈발리에와 라카미에를 몰아내고 40세의 나이에 LVMH의 회장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동안 명품업계는 가문 중심으로 소규모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르노 회장은 명품도 그룹사로 운영하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욱더 공격적인 인수 합병을 합니다. 셀린느, 로에베, 마크제이콥스, 세포라, 펜디 등 수많은 명품 브랜드를 인수했고 2019년에는 티파니까지 손에 넣습니다. 현재는 75개의 명품 브랜드를 이끄는 기업의 수장이 됩니다.

     

    5. 파리 올림픽 공식 후원사

    2024년 7월부터 개최되는 파리 올림픽은 가장 럭셔리한 올림픽이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그 이유는 프랑스의 시가총액 1위 기업이자 명품브랜드 기업 LVMH가 2200억 원을 통 크게 후원했기 때문입니다. 파리 올림픽과 패럴림픽의 최대 스폰서가 된 LVMH 덕분에 이번 파리 올림픽의 상징들도 럭셔리해졌습니다. 7월 14일 올림픽 성화 봉송식에서는 성화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커다란 루이비통 트렁크에서 성화를 꺼냈습니다. 메달 트레이도 모두 루이비통에서 특별 제작을 했습니다. 올림픽 메달은 LVMH의 보석브랜드 쇼메가 디자인했습니다. 주얼리 브랜드인 만큼 예술적인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메달 뒷면에는 에펠탑의 보수 공사에서 채취한 실제 에펠탑 철근 일부를 붙여서 제작했습니다. 선수들의 올림픽 단복은 LVMH의 남성 브랜드 벨루티에서 만들었습니다. 또한, 500명이 넘는 올림픽 자원봉사자들도 루이비통에서 특별히 디자인 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명품 브랜드가 올림픽을 후원하는 최초의 사례로 기업의 가치와 글로벌 인지도를 높이고, 자국의 올림픽에 품격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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