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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보처럼 꾸며진 멋진 쇼룸이 있고 저렴한 조립식 가구가 있는 다국적 기업 이케아. 전 세계 54개국에서 372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북유럽 스타일을 리드하는 대표주자 이케아의 역사와 위기, 성공 비결을 소개합니다.

     

    이케아

     

    1. 이케아의 역사

    이케아의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는 스웨덴 남부 인구 72만 명의 스몰란드에서 태어납니다. 성실하고 겸손하고 강인한 캄프라드는 어려서부터 장사를 좋아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성냥, 크리스마스 장식, 펜, 씨앗 등을 팔고 다녔습니다. 장사를 하다 보니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서 대도시에 나가 물건을 해오는 기술도 익혔습니다. 그러다 1943년 17살이 되던 해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합니다. IKEA는 이케아의 이름은 본인의 이름 Ingvar Kamprad에서 I와 K를, 그가 자란 농장의 명칭 Elmtaryd에서 E, 그가 자란 도시의 이름 Agunnaryd에서 A를 따서 붙였습니다. 처음에는 시계, 넥타이, 양말 등 잡화를 주문받아 우편으로 발송해 줬습니다. 이때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을 휩쓸었던 나일론 스타킹까지 구해서 취급한 결과 아버지와 어머니가 농장 일을 제쳐두고 제품 포장을 도와야 할 정도로 사업이 대박이 났습니다. 난독증이 있었던 캄프라드 대신 부모님이 회계도 맡아주시며 가족 경영을 이어갔습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짓던 농장은 물류 창고로 쓰고, 농장에서 우유를 싣고 기차역으로 나르던 트럭은 배송 차량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유를 배송해 주던 트럭의 경로가 바뀌면서 더 이상 제품을 배송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 캄프라드는 기차역 근처에 오래된 가구 공장이 매물로 나왔는데,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공장을 매입하는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 지역은 가구단지여서 스몰란드의 가구 제조 업체가 모여있었습니다. 이때 캄프라드는 이케아의 두 가지 전략을 만들게 됩니다. 첫 번째, 제품은 가구만 팔 것. 당시 스웨덴 정부가 주택 공급을 늘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구 수요가 늘 것이라고 예측했고, 가구가 비쌌기 때문에 누구나 살 수 있는 저렴한 가구를 유통하기로 합니다. 둘째, 인수한 공장을 쇼룸으로 만들어서 오픈하기로 합니다. 당시 가구를 마음껏 만져보고 앉아보며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캄프라드는 쇼룸을 방처럼 꾸며놓고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손님들에게 말린 야생화를 꿀에 절인 전통차를 대접하게 되면서 이케아는 동네 사랑방처럼 편안한 공간이 됩니다. 그러나 가구는 부피가 커서 배송이 쉽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이 테이블을 차에 싣는 과정에서 너무 커서 실리지 않자, 직원이 다리를 일단 떼서 상판을 먼저 싣고 나중에 다리를 다시 조립하자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캄프라드는 아이디어를 얻어 조립형 가구 플랫팩을 탄생시킵니다. 조립하지 않고 가구를 보내면 파손을 줄일 수 있고, 완제품 하나만 전시하고 나머지는 창고에 보관할 수 있어서 전시 공간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조립, 포장, 물류, 배달 모든 과정에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조립하지 않은 형태로 가구를 판매한다고 하니 주변에서는 우려했지만 실제로 고객들은 자신들이 가구를 완성하는 과정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며 이케아는 해가 갈수록 더욱 번창하게 됩니다.

     

    2. 이케아의 위기 - 가구 업계의 반발

    스웨덴 가구 업체들이 이케아가 잘 나가자 저렴한 가격을 문제 삼아 동업자 의식이 없다며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이케아를 가구 협회에 받아주지도 않고, 가구 박람회에도 못 들어오게 합니다. 점점 이케아 불매운동, 표절 시비, 하청생산 중지, 원목 공급 중지까지 시키며 이케아를 따돌렸습니다. 이때 캄프라드는 이케아의 생산공장을 모두 인건비가 저렴한 동유럽으로 옮기고, 그 결과 원가가 절감되고 생산성은 더 향상되면서 이케아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이런 시련이 이케아를 더욱 성장하게 했습니다.

     

    3. 이케아의 성공 비결 - 캄프라드의 구두쇠 정신

    한때는 세계 4위 부자였던 이케아의 창업자 캄프라드는 일상을 아주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1993년산 볼보를 15년간 탔으며, 그것도 아까워서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비행기는 비즈니스석을 타거나, 고급 호텔에 묵은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호텔 미니바에서 음료를 하나 마시면 다음 날 본인이 편의점에 가서 음료를 사 와 채워놓을 정도로 알뜰했습니다. 캄프라드의 이런 구두쇠 정신이 매장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캄프라드가 매장에 연필을 비치할 때 바이어에게 저렴한 연필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자 바이어가 스웨덴의 일반적인 노란색 긴 연필을 가져옵니다. 그는 연필을 반으로 뚝 자르더니 이제 연필 두 자루가 되었고, 색깔을 입힐 필요도 없으며, 이제 앞으로 이케아의 보통 연필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원가 절감, 비용 절감을 강조하며 이케아에서 특별한 두 가지가 절대 상품과 쇼핑 보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절대상품은 이케아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저렴한 상품이 최소 10개는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고객이 보는 순간 헉 소리가 날 만한 가격이고 대신 품질은 우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케아는 저렴한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보상은 스웨덴의 유명한 미트볼과 핫도그를 저렴하게 제공하여 쇼핑 중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입니다. 캄프라드는 저렴하고 맛있는 핫도그를 제공하기 위해 음식 전문가들과 회의했고, 그 결과 핫도그 DIY로 고객이 스스로 양파, 피클, 소스를 뿌려서 자신만의 핫도그를 만드는 방식으로 비용을 절감했습니다. 이익이 남지 않을 것 같은 푸드 매출로 연간 2300억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대량판매로 원가를 낮추고 가구부터 음식까지 가성비 좋은 제품으로 사랑받은 이케아는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케아를 운영하는 동안 업적도 많았지만, 논란도 많았던 잉바르 캄프라드의 검소하고 소박한 삶은 많은 기업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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