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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수 비비의 밤양갱 노래가 히트하면서 밤양갱의 매출이 전년도보다 30% 이상 상승했다고 합니다. 밤양갱과 비비의 콜라보레이션 제품까지 출시한 크라운 해태의 윤영달 회장은 노래 덕분에 양갱 생산을 늘렸을 정도로 문화의 힘이 대단하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크라운제과의 역사와 히트상품, 마케팅 전략 등을 소개합니다.
1. 크라운제과의 역사
고 윤태현 회장은 해방이 되자 형과 함께 일본인이 운영하던 삼덕당이라는 빵 공장을 인수합니다. 손재주도 좋고 성실했던 형제의 빵 사업은 금방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서울역 뒤편 중림동에 부엌 한 칸만 세를 내어 독립을 하고 영일당을 엽니다. 윤태현 회장은 빵 표면에 식용 글리세린을 발라 빵을 먹음직스럽게 만들고, 수분이 날아가는 것도 막아주며 인기를 얻습니다. 또 영일당은 서양의 고급 과자 웨하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서구식 과자와 영일당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에게도 안심하고 먹일 수 있는 고급 과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왕관을 그려 넣고 크라운 제과로 상호를 바꿉니다. 이 시기에 비스킷의 수요도 생기게 됩니다. 미국의 원조 물품이나 미군 PX에서 나온 보급품의 비스킷을 맛본 국내 소비자들이 비스킷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연히 보급품을 선물 받은 윤태현 회장도 비스킷을 맛보기 전에 냄새도 맡아보고 분석한 뒤 비스킷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누구도 비스킷을 만드는 기술도 없었고,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연구해서 비슷한 모양을 개발합니다. 그렇게 다이아몬드형 비스킷인 크라운 산도가 탄생합니다. 산도는 1956년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최초의 샌드과자라는 점에 의의가 있습니다. 윤태현 회장은 과자 만드는 기계를 직접 만듭니다. 해외에서 들여온 과자 기계를 직접 수만 번 분해하고 조립하여 기계 전문가가 되었고, 원하는 과자를 만드는 기계를 생산할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윤태현 회장의 철학은 재료를 아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귀했던 좋은 밀가루와 우유, 버터 등의 고급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가게가 용산과 가까웠기 때문에 미군들이 방문하여 산도를 사 갈 정도로 입소문이 났습니다. 또 마군들에게 돈 대신, 버터와 밀가루를 받고 산도와 물물교환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받은 밀가루와 버터를 아낌없이 다시 산도를 만드는 데 사용하여 과자 품질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2. 윤영달의 등판과 히트 상품
윤태현 회장의 아들 윤영달은 청소년 시절 미국에서 유학합니다. 그는 미국의 가정에서 아침 식사 대용으로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먹는 모습을 보고 시리얼을 만들어보고 싶어 했습니다. 25살에 한국에 돌아와 크라운 제과에 입사해 시리얼 만들기에 도전했는데, 시리얼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습니다. 기술이 없었던 윤영달은 한국 사람이 많이 먹고 익숙한 뻥튀기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옥수수, 보리, 팥, 율무까지 모든 곡물을 한 번씩 튀겨봅니다. 그중 밀 쌀을 튀겼을 때 가장 맛있고 영양이 좋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튀긴 밀 쌀에 설탕으로 코팅해서 죠리퐁을 만들어냈고 스테디셀러가 됩니다. 윤영달은 1995년 크라운제과의 대표이사로 취임하고 벨기에에서 먹었던 와플을 과자로 소개하겠다는 꿈을 펼치며 버터 와플을 출시합니다. 과자 업계에서는 파격적인 함량의 우유와 버터를 첨가합니다. 또한 과자의 신선함을 살리기 위해 유통기한을 3개월로 단축하고, 3개월이 지나면 전량 폐기합니다. 이렇게 향긋했던 버터 와플은 시장에 출시하자마자 대박이 납니다.
3. 직영 납품의 시작
1970년대 과자는 도매상을 통해서만 유통할 수 있었는데 도매상들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트에서 주문한 제품 대신 다른 회사의 과자를 납품하거나, 같은 제품의 가격도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윤영달은 코카콜라가 빨간색 운송 차량에 콜라를 싣고 소매상에 직접 유통하는 것처럼 과자를 직접 납품하기로 합니다. 가격도 일관되게 100원짜리를 76원으로 납품하자 전국의 도매상에서 크라운제과의 제품을 불매하기 시작합니다. 6개월이 지나자, 매출이 반으로 떨어지며 초조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다른 제과 업체들이 크라운의 직접 판매 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합니다. 제품 공급가를 일제히 76%로 고정시키자 도매상들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후 크라운제과는 직영 납품을 시작했고, 제과 업계 전반에 직판 시스템이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4. 마케팅 전략 - 크로스 마케팅
크라운은 제과 회사들과 파트너십을 맺었습니다. 이때 한국과 취향이나 규모가 비슷한 대만의 과자 기업들을 찾아갑니다. 대만의 과자를 크라운에서 생산해서 한국 시장에 출시하고, 크라운 과자를 대만에서 생산해서 대만에서 팔아보자고 제안합니다. 대만의 제과 기업들은 처음에는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합니다. 결국 크라운제과는 대만의 왕왕 그룹과 협력하여 참쌀 설병과 참쌀 선과를 출시하고, 그 밖에도 대만 회사들과 합작해서 미인블랙, 델리오슈, 와르페, 롤웨하스 등의 과자를 선보였습니다. 이 과자들은 대만에서 수입하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OEM 방식으로 생산하고 브랜드만 붙인 것입니다. 크라운제과는 이 제품들로 1년 동안 100억 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들 회사와의 협력으로 크라운제과의 초코파이, 뽀또, 쿠크다스를 대만 시장에 출시하여 1년 동안 60억 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윤영달 회장이 고안한 크로스 마케팅은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고, 제품을 새로 개발하지도 않으면서도 매출을 증대시킨 WIN-WIN 전략으로 마케팅 교과서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5. 크라운제과의 사회 공헌
크라운제과의 윤석빈 대표는 디자인 박사학위를 받으며, 제품 패키지 디자인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2016년 죠리퐁에 실종아동 찾기 정보를 싣습니다. 그동안 33명의 장기실종 아동의 정보가 실렸고, 6700만 봉지에 인쇄되어 나가면서 5년 동안 실제로 2명의 실종자가 가족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미아방지, 유괴 예방수칙을 적거나, 아동학대 예방 캠페인 등을 과자 봉지에 인쇄하며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6. 크라운의 해태제과 인수
1945년 일본 양갱공장의 직원이었던 박병규가 적산 기업으로 불하받아 해태제과 합명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합니다. 해태그룹은 연양갱으로 시작하여 홈런볼, 맛동산, 버터롤, 에이스, 샤브레, 브라보콘, 오예스 등의 히트작을 연이어 냅니다. 해태그룹은 매출이 커지자, 식품 외 여러 계열사로 사업을 다각화합니다. 그러다 1997년 11월 부도가 나고, 2000년에는 법정관리에 들어가 외국계 사모펀드에 넘겨졌다가 2004년 크라운제과에 인수됩니다. 그렇게 제과업계 5위였던 크라운제과는 해태와 하나가 되어 제과업계의 선두자리에 오릅니다. 크라운은 해태를 인수하며 양사를 합병하는 대신 겹치는 품목은 정리하고, 주력 제품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쟁력을 키우고 각자의 문화를 유지하며 개별적인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현재 크라운제과는 윤영달 회장의 장남 윤석빈 대표가, 해태는 윤영달 회장의 사위인 신정훈 대표가 이끌고 있습니다. 최근 레트로 과자의 수요가 살아나며 크라운의 밤양갱, 해태의 연양갱 모두 잘 팔리며 크라운 해태는 매출이 늘어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