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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간 1억 병씩 팔리며 소화제가 있습니다. 소화제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국민 소화제 '활명수'를 만드는 동화약품은 기업 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했습니다. 활명수의 역사와 동화약방의 시작, 독립운동을 통환 사회 환원을 알아보겠습니다.

     

    동화약품

     

    1. 활명수의 역사

    활명수의 역사는 1897년 대한제국과 함께 시작합니다. 활명수를 만든 사람은 오늘날 대통령 경호관에 해당하는 선전관이라고 하는 벼슬을 하던 민병호 선생입니다. 민병호는 왕실을 경호하다 보니 궁중 처방 비법에 밝았습니다. 일찍이 서양 의학도 접했던 민병호가 해결하고 싶은 한국인의 고질병은 '토사곽란'이었습니다. 조선인은 오래전부터 맵고 짠 음식을 즐기고, 고봉밥을 급히 먹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자주 체하고 위장장애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체나 토사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종종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약이라고는 달여 먹는 탕약뿐이었습니다. 민병호는 왕실에서 사용하고 있는 궁중 한약 비법과 서양의 양약을 혼합한 약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하는 물이라는 뜻의 활명수를 만듭니다. 활명수가 개발되었던 1897년 서양에서는 아스피린이 개발되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면, 조선에서는 활명수가 개발되어 체해서 죽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활명수에는 소화 불량에 좋은 한약재인 아선약, 정향, 육두구, 육계, 후박 등등 수많은 한약재가 들어갑니다. 여기에 서양의 제약 기술을 빌려서 생약 성분을 끓이는 대신 적포도주 같은 알코올을 넣어서 침출 시킵니다. 탕약을 달이는 훨씬 더 대량 생산할 수 있었고 효율적이었습니다. 이때 활명수는 탄산가스가 없는 원액이라 쓴맛이 나서 먹기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쓴맛을 감추기 위해서 박하와 설탕을 넣어서 물약 시럽처럼 만들었습니다.

     

    2. 동화약방의 시작

    약이 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활명수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명약 같은 존재였습니다. 활명수는 오랫동안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기사회생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전국에서 이 약을 찾기 시작하자 민병호 선생은 자신의 집에 동화약방이라는 간판을 걸고 본격적으로 활명수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동화란 '같이 화합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유교 경전의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예리함이 쇠도 자를 수 있다. 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평안해진다.'라는 글귀에서 따왔습니다. 설립 이념 자체가 국민과 나라를 돌본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활명수가 인기가 높아지자 회생수, 활명액 등등 60여 종의 유사 제품이 등장합니다. 이때 민병호 선생의 아들 민강 선생이 '우리가 다른 유사품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상표를 하나 만들자'라고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최초의 상품 부채표 활명수라 이름을 붙입니다.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뜻을 민족정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동화약품은 1910년 최초로 활명수 부채표를 상표권 등록을 합니다.

     

    3. 독립운동

    민강 선생은 14세부터 아버지와 함께 활명수를 만들었는데, 아버지가 활명수로 이룬 부를 독립운동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처음에는 1907년 서소문 주변 지역의 유지들과 뜻을 모아 학교를 세웁니다. 가난해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고 후학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80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비밀결사대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합니다. 1919년에는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이때 한성에는 한성 임시정부가 있었습니다. 민강 선생은 이 두 기관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약방에 비밀 연락 사무소를 설치하면 일본 경찰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약방을 비밀연락 사무소로 사용하도록 자처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동화약방 건물에 '연통부'라는 시설을 설치합니다. 여기서 민강 선생은 국내외 연락을 담당했고, 독립자금을 조달해서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행정 책임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상해에 돈을 보내는 일이 매우 위험했습니다. 그들은 상해에 돈 대신 활명수를 보냈고, 상해 임시정부는 활명수를 팔아서 독립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2년 뒤 연통부는 일본의 밀정에 의해 발각되고, 이 일로 민강 선생은 갖은 고문을 받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민강 선생은 생전에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 때문에 동화약방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여 사업은 크게 기울었습니다.

     

    4. 동화약품의 사회 환원 사업

    창업 40년 만에 동화약방은 폐업 위기에 처했지만, 또 다른 민족 운동가 윤창식 선생에게 인수됩니다. 윤창식 선생은 백범 김구와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으나, 집안의 장손이자 가장이었기 때문에 대신 한국에서 사업을 통해 독립운동을 후원하기로 합니다. 동화약방은 해방과 한국전쟁까지 무사히 지나오며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한국인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6.25 전쟁 이후 윤창식 선생은 아들 윤광렬과 함께 사업을 재건하여 상호를 동화약품공업으로 변경합니다. 전쟁 이후에는 여러 곳에 공장을 증축하고 판매를 성장시키며, 세계적인 제약 회사들과 제휴를 통해 수많은 신약을 개발합니다. 이때 개발한 약이 후시딘, 알프스디, 판콜에이, 홈키파 등 활명수의 뒤를 잇는 히트 제품을 들 연이어서 개발해 냅니다. 윤광렬 선생은 사업뿐만 아니라 사회 공헌 사업도 이어갔습니다. 1973년에는 희귀 약품 센터를 오픈해서 구하기 어려운 의약품을 수입해서 전국에 실비로 제공했습니다. 정부 보건당국도 하지 못했던 일은 해낸 것입니다. 매년 활명수 기념판을 발명해서 수익금 전액을 불 부족 국가에 지원하고 있고, 이 밖에도 많은 사회 환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동화약품은 한국의 가장 오래된 제조회사이자 제약사, 최초의 등록상표, 등록 상품까지 4가지 부분에서 한국의 기네스를 달성했습니다. 설립 초기에 동화약품이 민족과 함께하고자 했던 기업가 정신이 앞으로도 쭉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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